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제56회 추도일(7월 19일)을 맞으면서, 국내 환경분야 원로이신 박창근 위원장의 말씀을 듣다.
박창근 위원장은 국내,외 각종 환경문제에 관해서 거의 최초로 문제를 제기하여, 모든 국민들은 물론, 국제적으로도 환경에 눈을 뜨게 하였는데, 1986년 지구의 인류가 50억명이 되었을 때, UN은 세계의 환경문제가 인구증가에 기인함을 인식하여, 세계 각국에서 환경문제에 앞장선 선구자와 국가 원수 그리고 종교, 철학 지도자들 중에서 500명을 선정하여,“Global 500인”상을 수여하고, 이들로 하여금, 지구 환경보호에 앞장서도록 하였다.
수상자로는 세계적인 종교 지도자 ‘달라이 라마’, 미국의 ‘엘 고어’ 부통령, 영국의 여왕, 침펜지의 대모 ‘제인 구달’ 등과 한국에서는 박창근 위원장과 권숙표, 노재식 박사님 등이 ‘Global 500’으로 선정되셨다. 일사회 원로이신 이 박창근 위원장으로부터 건국 대통령 이승만 박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기로 하였다.
류재권 논설위원 : 지난 7월 19일은 하와이에서 서거한 고(故) 이승만 건국 대통령님의 제56주기 추도일이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기념사업회 주관으로 해마다 동작동 소재 국립현충원에서 유족인 이인수 박사와 조혜자 여사를 비롯한 정·관계 인사들과 시민들이 참석하여 추도식을 갖고 그분의 업적을 기리며 묘소를 참배하고 헌화하였습니다.
류 위원 : 박창근 위원장님, 오랜만입니다. 먼저 대한민국을 건국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님의 노고와 업적에 대해 간추려 들려주십시오.
박 위원장 : 한마디로, 이승만 대통령은 일제시대 조선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한 최고의 항일 애국자입니다. 일제 강점기에 처음, 투옥되어 감옥에서 <독립정신> 이란 책을 썼는데. 그 원고가 비밀리에 감옥 밖으로 전해져서 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필독서가 되었지요. 그 후 미국 유학중에도 나라를 되찾는 일이 우선임을 깨닫고 1910년 10월 한일합방으로 일제에게 빼앗긴 조국에 귀국하여 전국 방방곡곡을 돌며 청년들에게 성경과 서양 역사 국제법을 가르쳤습니다. 이 박사는 기독교청년회(YMCA)조직운동을 펼쳐, 일본의 신경을 크게 건드리기도 하였지요.
류 위원 : 이승만 박사는 주로 해외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셨다면서요?
박 위원장 : 이승만 박사는 1919년 9월6일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셨고,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를 개설하여 미국, 유럽에 독립운동으로 외교활동을 총괄하였습니다.
이승만대통령은 외교적으로 독립을 하기 위해서 최선의 노력을 다했는데, 외교적 독립을 위해서는 일본에게 선전포고를 함과 동시에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해야 비로소 해방 이후에 우리나라가 자주적인 독립을 할 기회가 생긴다는 것을 알았고, 이에 중경 임시정부는 이승만의 요청을 받아들여, 대일본 선전포고를 하였지요.
“그동안, 좌파들이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적화통일(赤化統一)을 꾀하는 속에서도, 이 나라가 이만큼이나마, 자유, 민주주의를 지킬 수 있었던 것은 이승만 대통령의 굳건한 조국애와 동포애가 뿌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류 위원 : 이승만대통령님은 대한민국 최초로 국제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았다고 하던데요?
박 위원장 : 그를 비평하는 사람들은, 1941년 일본의 진주만 기습을 앞두고 그분이 저술한 태평양전쟁 발발과 더불어 미국에서 베스트셀러가 되었던 ‘Japan Inside Out’(일본, 그 가면의 실체)를 한번 읽어 보기라도 했으면 합니다.
그 분은 당시 태평양 전쟁을 예고한 『Japan inside out(일본 내막기)』 논문이 1941년 7월 출간되어 일본의 진주만공격이 임박했음을 예고한 선지자였습니다. 4개월 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하여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이승만 박사의 논문이 best seller가 되었고 미국 등 조야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어요.
더구나 해방 이후 ‘해방 공간’에서와 대한민국의 건국 과정과 6.25 전쟁 전후 이승만 대통령이 전개했던 대미외교를 기록으로 접할 기회를 갖는 사람이라면 이승만 대통령을 가리켜 ‘미국의 앞잡이’라고 폄하하기는 불가능 하지요.
이승만 대통령은 1910년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의 영향을 받은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d)>라는 논문으로 철학박사학위를 취득했지요. 이는 1776년부터 1872년까지의 국제법상에서의 전시중립을 다룬 것이었는데, 이승만의 전공은 국제법이었으며, 부전공은 미국 역사와 서양사였습니다.
그의 논문은 1912년 프린스턴대학 출판부에서 출판이 되었는데, 이는 높은 학문적 평가를 받은 것을 입증한 것으로 한국인으로는 최초였지요. 이로써 이미 미국에서는 유명하게 되었고, 한국 역사상 최초의 국제정치학자가 되었습니다. 그분은 세계 흐름을 예견한 혜안을 지닌 국제외교의 전문가였습니다.
류 위원 : 이승만 건국 대통령을 친일로 매도하는 극소수의 사람들이 아직도 한국사회에 목소리를 높이는 현실이 안타깝게 생각됨으로 이승만 대통령에 대한 많은 역사적 사실 중에서 몇 가지만 추려서 들려 주십시요.
먼저 좌우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시기에 자유민주주의를 이 땅에 심기위하여 해방 후 이승만 대통령이 노력하신 업적에 대하여 말씀해 주십시오.
박 위원장 : 해방직후의 혼란기와 6.25전쟁 등 중대위기에 직면했던 이승만 대통령은탁월한 위기관리능력을 발휘했다는 평을 받았습니다. ‘신탁통치 반대’, ‘단독정부 수립’, ‘미군의 6.25참전 유도’ 등 그 분 특유의 결단력을 통해 대한민국의 국체를 지켰다는 것입니다.
당시 소련의 공산주의 쓰나미가 동구권을 비롯하여 전 세계를 휩쓸고 있을 때 공산주의를 막고, 소련의 꼭두각시 위성국이 되는 것을 막아낸 유일한 인물입니다. 소련의 강력한 힘을 바탕으로 주변 40여개 국가가 도미노현상으로 공산화로 무너지던 시기에 소련과 가까이 있으면서도 공산화가 되지 않은 나라는 대한민국이 유일했지요.
이승만대통령은 ‘대한민국은 반공국가여야하며 공산주의와 공존할 수 없다’고 분명히 선을 그었는데, 그 뿌리가 오늘 까지 이어져, 한국을 자유민주주의로 지킨 것입니다.
류 위원 : 김일성, 박헌영에 의해 6.25라는 불법 남침을 당할 시기에 대한민국을 둘러싼 국제관계에 대하여 들려 주십시요.
박 위원장 : 미국과 소련 간의 냉전이 종식된 후 1994년 1월 김영삼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하여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한 소련의 기밀문서와 중국의 문서 등에서 6·25가 남침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가 담긴 문서가 발견되면서 6·25 사변의 전모가 실증적으로 드러났지요.
6·25 사변은 북한의 김일성과 박헌영이 스탈린의 허락을 받고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으며 면밀히 계획을 세워 전격적으로 남침을 단행한 침략이였습니다. 1949년 3월 17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에게 남침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했으나 스탈린은 미군이 4월 30일 까지 마지막 철군을 앞두고 있어 미국 개입을 우려하여 처음엔 반대했으나, 1950년 1월 미국 애치슨 국무장관이 ‘에치슨 라인’을 선포, 미국의 새로운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하자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나는 당신을 도울 준비가 돼있다”고 비로소 알렸다고 해요.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전쟁 개시를 승인하고 필요한 무기와 군수물자를 공급해주겠다고 약속했어요. 그 당시 박헌영은 38선을 넘어 월북하여 김일성과 스탈린에게 보고하기를 “이미 남로당은 20만 명이 조직되어있어 서울만 점령하면 남한 전역에서 남로당이 ‘김일성 만세!’를 외치며 봉기할 것이다.” 라고 호언장담, 남침을 촉구했는데. 그러나 휴전 후 결국 박헌영은 김일성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했지요.
마오쩌둥은 5월 15일 “남한에 대한 공격이 미국이 다시 개입하는 위험을 감수하기 전에 남아있는 국민당을 물리치는 것이 우선순위지만, 원칙적으로 북한을 도울 것을 약속하되 장기전을 피하라”고 경고했지요. 1950년 4월 김일성과 박헌영이 재차 소련을 방문 남침 허락을 청했고 스탈린은 “무기는 러시아가 주겠다. 병력은 중공의 도움을 받아라.”고 지시해서, 드디어 6월 25일 새벽 침공이 시작됐었어요. 작전명은 「선제타격」이었으나 이후 「반격계획」으로 작전이름을 바꾸었는데 즉 남한이 먼저 38선을 쳐들어와서 북한이 반격했다는 위장 전술을 사용했습니다.
류 위원 : 이대통령은 국군통수권자로 정일권 참모총장께 북진통일을 명령했었다고 하는데 그 경위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박 위원장 : 내가 알기로는 그것은 1950년 10월 1일 동부전선(東部戰線)에서 이루어진 국군의 38선 돌파는 국군의 작전지휘권을 유엔군 사령관에게 위임하고 있는 상황하에서 이승만 대통령이 국가와 민족의 이익을 위하여 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권도(權道)로 일시 행사한 모습을 보여준 사건이었습니다.
9월 3일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은 38선을 넘어가려면 UN의 허락이 필요했는데 그래서 유엔군은 38선에서 북진을 망설였습니다.
이승만대통령은 “국군에 대한 작전 지휘권을 장악하고 있는 유엔군 사령관의 지시가 없다”고 난색을 표하는 정일권 육·해·공군 참모총장에게 “귀하는 대한민국 국군의 통수권자인 내말을 듣고 북진하라”는 명령을 붓글씨로 써서 북진 통일 진격명령을 내렸고, 한국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38선 돌파 명령을 수행하게 만들었어요. 다행히 UN도 10월 7일 북진을 결의하였고 10월 8일부터 38선을 넘어 북진이 시작되었는데 이처럼 북진을 이끌어낸 분은 바로 이승만 대통령입니다. 그래서 국군이 최초로 38선 돌파가 결행된 날인 10월 1일이 지금 의 <국군의 날>이 되었지요.
류 위원 :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반공포로 석방을 단행한 이승만 대통령에 얽힌 이야기를 들려 주십시요.
박 위원장 : 1953면 6월 18일부터 21일까지 사흘에 걸쳐 부산 대구 영천 마산 광주 논산 부평 등지의 포로수용소에 분산 수용되어있던 반공포로들이 이승만 대통령의 명령을 수행하는 한국군 헌병들에 의하여 일제히 석방되었어요.
이 조치로 35,451명의 반공포로들 가운데 26,424명이 석방 되었으며.이승만 대통령에 의한 조치는 한국이 반대하는 내용으로 마무리되고 있는 판문점 휴전협상에 대한 그분의 반대 의지를 극적으로 폭발시킨 거사였습니다.
이로 인하여 막바지에 접어들고 있었던 판문점 휴전협상에는 예상치 않았던 위기가 조성되었어요. 당황한 미국 정부가 주한미군을 통하여 시도한 석방된 반공포로들의 재수용은 한국 정부와 국민들의 협조 거부로 허사가 되었습니다.
류 위원 : 휴전 협정 묵인 조건으로 이승만 대통령이 미국에 약속을 받아낸 내용에 대해서도 말씀해 주십시오.
박 위원장 : 나중에 출범한 미국의 아이젠하워 정부는 문제의 반공포로석방 직후인 6월에 로버트슨(Walter Robertson)특사를 그리고 다음 달인 7월에는 덜레스( john Foster Dulles)국무장관을 서울로 파견하여 이승만 대통령의 반발을 무마하는 설득외교를 전개했답니다.
이 과정에서 이승만 대통령은 휴전협상 타결을 묵인하는 대가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한국군 증강, 그리고 주한미군의 유지 등을 내용으로 하는 ‘안보공약’을 미국으로부터 쟁취하는 뛰어난 외교적 수완을 발휘했습니다.
“이 안보공약이 해방 후 70여년 오늘날 대한민국의 성장을 지켜온 울타리가 되었지요. 이때 미국 유학을 다녀온 국군 장교들이 후에 한국의 현대화를 이끌어가는 엘리트층인 인재들로 활약했으며 이때 배운 군사경영 기술이 각 기업체 경영에도 전파되었고, 1953년 7월 12일 상호방위조약의 기초를 다졌습니다.”
한편 이승만대통령은 국제법 전문가였습니다.
누구에게나 그런 것처럼 인간 이승만에 있어서도 많은 공과가 있을 것은 당연합니다. 그분에게는 장기집권이라는 오명이 씌워져 있지요.
그러나 그분에게는 오명을 덮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공적(功績)이 있는 위인(偉人)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을 떠나서 그는 대한민국의 모든 국민들에게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게 해 주었고, 북한을 따라 갈 뻔한 길을 가지 않게 만들어 준 큰 은인(恩人)이라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 그를 비평하는 사람들이 친일(親日)문제를 가지고 그를 비난합니다.
그가 불모(不毛)의 땅에서 건국하면서 실무경험이 전무한 바탕위에서 ‘친일’경력을 가진 전문가들을 ‘용인(用人)의 차원’에서 활용했다는 것이라 할지라도 비판의 대상이 되는 것은 이해하기로 합시다.
그러나, 이승만 박사가 1945년 해방과 더불어 미국으로부터 귀국할 때까지 수십 년간 풍찬노숙(風餐露宿)을 무릅쓰고 해외 하와이와 객지를 전전하면서 벌린 항일독립(抗日獨立)운동에 대한 평가는 어째서 그렇게 인색해야 하는지요?
류 위원 : 56주년 추도일을 맞이하여 (고)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영원한 안식과 명복을 빌면서 마무리 말씀 부탁드립니다.
박 위원장 : 평화 협정이나 정전협정은 6·25 전범을 처벌한 후에나 가능합니다. 독일도 뉴런 베르크에서 전범을 처벌한 사례가 있은 후 평화협정 체결을 하였어요. 전범이 누구인지 재판을 통해 밝혀야 평화협정을 맺는 것이 정도인데 무조건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맺어 미군을 철수 시키려는 북한의 숨은 의도를 경계해야 합니다.
미국에서 국제정치외교학을 전공하여 국제관계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었던 혜안과 자유민주주의 시장 경제에 기초한 자유대한민국을 수립하고 6·25 전후를 통하여 발휘한 이승만 대통령의 위대한 업적이야말로 전후 70년 동안 잿더미 속에서 오늘날 세계경제 10위권의 국가로 초석을 다진 이승만 박사는 평생을 통하여 조국의 자주독립 국가를 이룩한 건국대통령으로써 56주년 추도의 해를 맞이하여 그 업적이 새롭게 조명되어지기를 바라고, 발전된 대한민국이 있게 초석을 쌓아준 이승만 대통령님에게 영원한 안식과 명복이 있으시기를 기원 드리고 싶습니다.
류 위원 :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