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건국대통령 (고)이승만 박사를 추도하며
  • 55주년 추도의 해를 맞이하여

    금년 7월 19일은 (고) 이승만 대통령 서거 55주년이 되는 해이다. 해마다 추도식은 (고)이박사의 아들 이인수 박사 내외분과 정계 주요 인사 등 많은 내외 귀빈이 서울 동작동 국립현충원 추도식에 참석 후 고인의 묘소를 참배해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의 안식과 명복을 빈다. 본인은 위기의 고비마다 발휘하셨던 이박사의 조국 대한민국의 현대사에서 빛나는 업적을 추도하면서 다시한번 고찰해보고자 한다.
    우리 모두는 (고)이승만 대통령이 대한민국을 건국하셨고, 농지개혁법과 의무교육을 최초로 도입하셨고, 한미동맹을 통한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해 그 바탕에서 오늘날 자유민주국가의 초석을 다진 건국대통령임을 부인할 수 없다.


    배재학당에서 자유·평등·인권사상 정신을 심어

    우남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자유, 평등, 인권을 바탕으로 하는 근대적 이념인 서양문물을 접하게 되었는데 독립협회 주관 민주공화제 혁명을 모의했다는 죄목으로 5년 7개월간 감옥에 사는 동안 영어공부와 성경을 통독하였고, 고종황제의 특사로 미국에 파견돼 루즈벨트 대통령과 면담하였으며, 을사보호조약이 체결되자 선교사들의 도움을 받아 미국 유학의 길에 올랐다. 조지 워싱턴 대학에서 학사학위를 받고 프린스턴대학에서 국제법 박사학위를 5년 만에 취득했다. 그 후 1910년 한일 합방을 맞아 귀국해 독립운동의 길에 올랐다.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 초대 대통령이 되었고, 하와이에서 3.1운동 이후 1019년 4월 23일 전국13도 대표로 구성된 한성임시정부 입정관 총재로 선출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Republic of korea)

    1919년 9월 6일 상해에서 조직된 대한민국 입시정부에서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고 워싱턴 D.C에 구미위원부를 개설해 미국, 유럽에 독립운동 외교활동을 총괄했다.
    당시 이승만은 태평양 전쟁을 예고하는 ‘Japan inside out’ 논문이 1941년 7월 출간돼 일본의 공격이 임박했음을 예고한 선지자였다. 4개월 후 일본이 진주만을 공격해 태평양 전쟁을 일으키자 이 박사의 논문이 best seller가 되었고, 미국 등 조야에서 유명하게 됐다.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국가를 건국한 ‘건국대통령’

    해방에서 건국에 이르는 길은 험난했다. 38선 이북에는 소련의 조종을 받는 공산정권이 들어섰고 이남에는 남로당이 집요한 공산화 투쟁이 전개돼 대구폭동사건, 제주 4·3사건, 여수순천 반란사건 등의 투쟁이 전개됐다.
    이승만대통령은 1945년 10월 16일 33년 만에 조국으로 귀국해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 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모두가 새나라 건설에 동참할 것을 호소했다.
    1945년 12월 28일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신탁통치를 결정하자 이를 반대하였고 한국문제는 UN에 이관할 것을 주장해 유엔이 남북한 자유선거를 위한 유엔 한국위원단 파견을 결의하였으나 소련이 UN의 북한 입국을 반대해 남북총선거는 무산되었고, 유엔 소총회에서 2/3 이상의 인구가 거주하고 자유선거가 가능한 남한에서 정부를 세우도록 결의했다.
    1948년 5월 10일 남로당 테러로 선거를 치르지 못한 제주도 2석을 제외한 198석으로 구성된 제헌국회에서 이승만이 초대 국회의장으로 선출되고 제헌국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됐다.
    1948년 7월 17일 자유 민주주의 시장경제를 이념으로 하는 제헌 헌법을 공포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을 전 세계에 공포하게 됐다.
    1948년 12월 12일 유엔 총회에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 됐다.

    세계적 성공사례, 농지개혁 단행 - 농노 해방 대통령 -

    1950년 3월 1일 소작료 명목으로 산출량 50%를 3년 동안 납부 조건으로 소작농이 자작농으로 전환되는 법이 통과돼 단 3년 만에 전 농지의 95.7%가 자작농이 됐다. 이일로 6.25때 인민군들이 농민들을 속여 공산주의 세상이 되면 지주들로 부터 농지를 빼앗아서 소작인들에게 나누어주겠다는 달콤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게 됐다. 이는 이승만의 큰 업적이 아닐 수 없다.

    6·25 동란 시 미국 유학시절 정계 지인들과 통화, 참전 협조 성사

    미국과 소련간의 냉전이 종식된 이후 1994년 1월 김영삼 대통령이 소련을 방문해 옐친 러시아 대통령이 김영삼 대통령에게 전달된 소련의 기밀문서와 중국의 문서 등에서 6·25가 남침임을 증명하는 결정적 증거가 담긴 문서가 발견되면서 6·25 전쟁의 전모가 실증적으로 드러났다. 6·25 전쟁은 북한의 김일성. 박헌영이 소련 스탈린의 허락을 받고 소련과 중공의 지원을 받으며 면밀히 계획을 세우고 전격적으로 남침을 단행한 침략 행위였다. 1949년 3월 17일 김일성과 박헌영은 스탈린에게 남침을 할 수 있도록 지원해달라는 요청을 했으나 스탈린은 미군이 4월 30일 까지 마지막 철군을 앞두고 있어 미국 개입을 우려 처음엔 반대했으나, 1950년 1월 미국 애치슨 국무장관이 에치선 라인을 선포 미국의 새로운 방위선에서 한반도를 제외하자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나는 당신을 도울 준비가 돼있다”고 비로소 알렸다.(Cold War International History Project, Issue 5, Spring 1005.PP 8~9 )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에게 전쟁 개시를 승인하고 필요한 무기와 군수물자를 공급해주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박헌영은 38선을 탈출 월북해 김일성과 스탈린에게 보고하기를 “남로당 20만 명이 조직되어있어 서울만 점령하면 남한 전역에서 남로당이 ‘김일성 만세!’ 를 외치며 봉기할 것이다.” 라고 호언장담했다. 결국 전쟁 후 박헌영은 김일성에 의해 간첩으로 몰려 처형당했다.
    마오쩌둥은 5월 15일 “남한에 대한 공격이 미국이 다시 개입하는 위험을 감수하기 전에 남아있는 국민당을 물리치는 것이 우선순위지만, 원칙적으로 북한의 동지를 도울 것을 약속하며 장기전을 피하라”고 경고했다. 1950년 4월 김일성과 박헌영이 재차 소련을 방문 남침 허락을 청했고 스탈린은 “무기는 러시아가 주겠다. 병력은 중공의 도움을 받아라.”고 했다. 드디어 6월 25일 새벽 침공이 시작됐다. 작전명은 ‘선제타격’이었으나 이후 ‘반격계획’으로 작전이름을 바꾸었다. 즉 남한이 먼저 38선을 쳐들어와서 북한이 반격했다는 위장 전술을 사용했다.

    3갈림길로 침입, 팽덕회가 이끈 중공군 참전

    6·25는 북한은 새벽 4시, 대한민국은 summer time 실시로 새벽 5시에 일어났다.
    6·25 당시 북괴군 1진은 6월 23일 북한 땅인 속초를 떠난 600명의 특수군을 실은 북한 함정이 부산으로 오는 도중 울산 앞바다에서 한국 해군에 의해서 침몰당한 사건이 벌어졌다. 만약 이 특수군이 부산에 침입해 후방을 교란시켰더라면, 정말 아찔한 순간이었다. 한국군의 전투에 사용된 함정은 미국의 해양대학교 해양실습선을 구입해 대포를 달아 전투함정으로 사용됐다. 즉 해군 장교 부인들이 삯바느질해 모은 기금으로 구입한 백두함정이었다
    북괴군 2진은 속초를 떠나 25일 새벽 2시 30분 정동진에 인민군 해병대를 상륙시켰고 춘천을 점령해 서울 수원 방향으로 진격하도록 계획 되어있었다.
    공군도 북한은 러시아 전투기가 100대를 투입하였는데 한국공군은 조종사 훈련기밖에 없어 공중 방어능력이 전무했다. 주력부대가 포천을 거쳐 의정부와 미아리를 지나 서울로 침투한 북괴군은 서울에서 점령식을 하고 3일간이나 여유 있게 머물렀다.
    북괴인민군은 폭격당한 한강을 건너려면 장비가 필요했다. 당시 한강다리는 광진교, 한강인도교, 한강철교 3개뿐이었는데 왕복선 철교 중 한 선만 간신히 파괴되지 않았다. 3진은 인천과 김포를 지나 군산, 남원, 광주, 목포, 순천, 여수를 거쳐 진주에 8월 4일 인민군 6사단이 나타났다. 인민군 6사단은 조선족으로 구성됐다. 조선 의용군은 장개석 정부군의 지원을 받고 지휘권도 장개석 정부군이었으며 600명 정도였다. 이들은 나중에 중공군에 투항하였고, 공산당이 1949년 10월 1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수립한 후 조선 의용군을 소멸시킬 목적으로 전쟁에 개입한 166사단이 사리원에서 인민군 옷을 갈아입고 쳐들어 왔다.

    일본 해군 LST 37척, 인천상륙작전 참전

    일본해군은 인천상륙작전에서 사용된 47척의 LST 함정 중에서 37척은 일본 해군 출신이 운영해 일본해군이 비공식으로 참전했다. 일본에서 전시작전에 필요한 군수 물자는 일본 공장에서 생산 조달한 군수품이었다. 오늘날 한,일 간 맺어진 지소미아 파괴는 유사시 일본의 협조를 얻지 못하는 국가 안보에 위험한 발상이 아닐 수 없다.
    자유중국 대만도 비공식 참전했다. 중공군 포로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통역이 필요해 대만에서 파견된 군인을 통역관으로 활용했다. 중공은 장개석 국군이 살려고 중공군에 투항해 모택동 군대로 투항된 군인들을 다시 한국전에 소모품으로 보냈다. 이들은 인해전술로 수류탄 2개 좁쌀떡 2개를 갖고 장구치고 나팔 불며 한국전에 개입했다. 이는 그만큼 전쟁 시 사용할 무기가 없었다는 증거였다.

    이승만 대통령이 북진통일을 명령

    9월 3일 정일권 육군참모총장은 38선을 넘어가려면 UN의 허락이 필요했다. 유엔군은 38선에서 전쟁을 망설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정일권 참모총장에게 “귀하는 대한민국 국군의 통수권자인 내말을 듣고 북진하라”는 명령을 붓글씨로 써서 북진통일 진격명령을 내렸다.
    UN도 10월 7일 북진을 결의하였고 10월 8일부터 38선을 넘어 북진이 시작됐다. 북진을 이끌어낸 분은 바로 이승만이었다.

    한미동맹으로 안보 100년 대계 구축, 8억불 미국원조 받아 군 장비현대화

    1953년 6월 이승만은 조지 워싱턴대학과 프린스턴 대학의 선후배사이인 덜레스 미 국무장관을 한국으로 불러, 한국군 70만 대군 운영하는 데 필요한 군수물자 지원과 식량과 양말, 속내의 까지 지원해주겠다는 약속과 1만 명의 한국군 장교 유학생을 보내서 선진화된 군사경영학을 배우게 했다. 이때 미국 유학을 다녀온 국군 장교들이 한국의 현대화를 이끌어가는 데 엘리트층인 인재들로 활약했으며 이때 배운 군사경영 기술이 각 기업체 경영에도 전파됐다. 1953년 7월 12일 상호방위조약의 기초를 다졌다. 이승만은 국제법 전문가였다.

    의무교육과 인재육성을 위한 교육 대통령

    1949년 6년제 의무교육을 도입해 문맹퇴치를 해 1948년 78% 문맹률을 1959년 22%로 낮추었고, 해방 후 19개인 대학이 1960년대엔 63개 대학으로 늘어났다.
    산업부흥으로 기술이 시장경제 발달을 초래한 경제대통령이다. 6,25 전쟁 중에도 부산에서 전후복구에 필요한 국가 인재를 양성하여야 한다는 혜안으로 부산에 전시 연합대학을 설립해 대학생들은 전쟁터로 나가지 않고 공부를 하도록 배려했다. 이승만은 이공계에 관심이 컸으며 하와이에 있는 동지회관을 매각한 돈으로 인천에 인하대학을 설립해 미국의 MIT 공대와 같은 기술 인재 양성에 전력하였으나 좌파들이 일제 잔재라고 하면서 인하대학교에 세워진 이승만 동상도 철거하여, 현재 인하대학교 창고 속에 보관하고 있다.

    (고)이승만 건국대통령의 영원한 안식과 명복을 빌면서

    평화 협정이나 정전협정은 6·25 전범을 처벌한 후에나 가능하다. 독일도 뉴런 베르크에서 전범을 처벌한 사례가 있은 후였다. 전범이 누구인지 재판을 통해 밝혀야 평화협정을 맺는 것이 정도인데 오늘날 무조건 종전선언과 평화협정을 맺어 미군을 철수 시키려는 북한의 숨은 의도를 경계해야 한다.
    미국에서 국제정치 외교학을 전공해 국제관계의 변화를 능동적으로 이끌어갈 수 있었던 혜안과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에 기초한 자유대한민국을 수립하고, 6·25 전후를 통해 발휘한 위대한 업적이야말로 전후 70년 동안 잿더미 속에서 경제 10위권의 국가로 번영하는 초석을 놓은 이승만 박사는 일평생을 통해 조국의 자주독립 국가를 이룩한 건국대통령으로써 그 업적이 새롭게 조명되어야 하며, 55주년 추도의 해를 맞아 오늘날의 발전된 대한민국이 있게 해준 이승만 건국 대통령의 영원한 안식과 명복을 기원하면서 이글을 맺는다.
    (본 논문은 이승만 건국대통령 기념사업회 http://www.syngmanrhee.or.kr/ 자료를 참고로 작성하였음을 밝혀둡니다).
  • 글쓴날 : [20-07-27 16:41]
    • admin 기자[ann7527@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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