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MZ. GOP 민통선 철책 따라 400km 국토횡단[2부]
고성군 명파리에서 철도 끝자락인 배봉리를 지나 백두대간로를 따라가다 보면 새삼 감회를 느낀다. 아주 오래전 민통선 자연탐사를 할때 신원조회까지 하고 까다로운 절차를 밟고 왔던 곳이다. 이 길은예전에는 지명도 없는 비포장 군사도로였으며 민통선 안에 있는 길이라 일반이 출입이 금지 되었다. 아직도 네이버 지도상에는 어긋나게 표시되어 있으니 도로명과 현지 주소로 찾아가야 한다. 부근 도로는 “백두대간”이란 도로명이 되었고 지금은 포장이 되어 있고 민통선 최북단을 산악을 가르는 경치 좋은 길이 되어 있다. 마달리 마을을 지나는 길은 아직까지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아 자연의 진미를 맛볼 수 있는 감추어진 멋진 도로이며 이색적인 풍광을 즐길 수가 있다. 백두대간 도로를 벗어나 휴전선 가까운 비포장도로로 통행을 하면 최전방 DMZ비무장지대를 담당하는 수색대대를 지나게 된다. 그리고 백두대간 길을 계속 가다보면 용하리를 지나 송강리에서 갈라져 건봉사로 갈 수 가 있다.
건봉사
건봉사는 최북단 사찰로 보물 1336호인 능파교가 있는 고찰이다. 이곳도 한때는 휴전선과 아주 가까운 민통선 안이기에 통제되어 쉽게 가지 못했던 곳이다. 그러나 지금은 언제든 돌아 볼 수 있으며 문화재와 자연의 볼거리가 많은 유명사찰이 되었다
건봉사(乾鳳寺)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사찰이며 1500년 전통 사찰이다. 강원도 고성군 거진읍 냉천리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소속 사찰이며 금강산 줄기가 시작되는 건봉산 감로봉의 동남쪽 자락에 있어 흔히 '금강산 건봉사'라 부른다. 이 지역은 휴전선 인근이라 대한민국 영역 중 최북단 지역에 위치한 곳이다. 신라 법흥왕 7년인 520년에 아도가 절을 짓고 원각사(圓覺寺)라 부른 것이 시초라고 전해지나, 이 지역은 당시 고구려의 영토였기 때문에 삼국 시대에 건립된 대부분의 사찰에 얽힌 창건 설화처럼 전설로 생각되고 있다. 남북국 시대부터 중건되고 불교 행사가 열린 기록이 있으며, 고려 초기에 고려 태조의 스승인 도선이 왕명으로 중수하고 원각사를 중수하고 절의 서쪽에 봉황 모양의 돌이 있다하여 서봉사(西鳳寺)라 불렀다. 고려 말기 공민왕 때인 1358년에 나옹이 중창하고 건봉사로 개칭하였다 한다.
건봉사는 임진왜란 당시 ‘서산대사’와 ‘사명대사’가 의병을 일으켜 최초 출정지이고 일제때는 독립운동을 ‘만해 한용훈’이 거처간 곳으로 사명대사 “의병기념관“과 ”만해 한용운 기념관“을 만날 수 있다. 6·25전쟁 전까지는 31본산의 하나였으나, 현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神興寺)의 말사이다. 520년(법흥왕 7) 아도(阿道)가 창건하고 원각사라 하였으며, 533년(법흥왕 20) 부속암자인 보림암(普琳庵)과 반야암(般若庵)을 창건하였다. 758년(경덕왕 17) 발징(發徵)이 중건하고 정신(貞信)·양순(良順) 등과 염불만일회(念佛萬日會:10,000일 동안 염불을 계속하는 모임)를 베풀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만일회의 효시이다.
사찰내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능파교를 건너게 된다. 1708년 능파교(凌波橋)의 비(碑)를 세운 능파교는 보물 1336호다. 건봉사는 1878년 4월 3일 산불이 일어나서 건물 3,183칸이 전소되기도 했었다. 6·25전쟁 때는 불에타서 완전히 폐허가 되었는데, 당시까지 현존하였던 당우로는 대웅전·관음전·사성전·명부전·독성각·산신각·단하각·진영각·범종각·봉청루·보제루·대지전·동지전·서지전·어실각·어향각·동고·낙서암·극락전·만일원·보안원·선원·원적암·사무소·불이문·여관·장의고·성황당·수침실(水砧室) 등 총 642칸에 이르렀지만 모두 불타서 없어진걸 현재는 일부는 재 건축된 것이다. 현재 고성 건봉사는 강원도 기념물 제51호로 지정되었고, 6·25전쟁 때 유일하게 불타지 않은 건봉사 입구엔 불이문(不二門)은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35호로 지정되어 있다. 그 밖에도 능파교와 십바라밀을 상징하는 조각이 새겨진 두 개의 돌기둥, ‘대방광불화엄경’이라고 새겨진 돌기둥 등이 있다. 그 동안 휴전선에 가까워 사람들의 발길이 없었던 민통선 탓에 건봉사는 자연과 함께 잘 보존되어 있고 보는 이로 하여금 역사와 고전이 흠뻑 젖게 하면서 힐링하기 좋은 곳이기도 하다. 건봉사로 입구에는 많은 부도들이 모여진 부도탑이 있는데 안으로 조금 들어가면 볼 수가 있는데 놓치지 않았으면 한다.
육송정 홍교
건봉사를 나와 “건봉사로“를 3km 쯤 가다보면 ”육송정 홍교“가 있다. 그러나 그 옆으로 새로운 다리가 놓여져 대부분 그냥 지나치니 확인하고 이동하면 놓치지 않는다. ”육송정 홍교“는 강원도 고성군 해상리와 탑현리의 경계에 있는 다리이다. “육송정 홍교“는 2002년 2월 6일 대한민국의 보물 제1337호로 지정되었다. 건립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능파교와 함께 을축년(1745년)의 대홍수로 붕괴되었던 점을 고려할 때 능파교(1704년 보물 1336호)와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1748년에 편찬된 《간성군읍지》에 육송정홍교가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없다고 기록되어 있어 능파교보다 더 오래되었을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모두 단칸 홍예교로 자연지형을 잘 이용하여 축조하였으며 특히 능파교는 축조연대와 건립자 등을 알려주는 비석을 구비하고 있어 홍예교 연구에 중요한 자료이며 건봉사 능파교와 육송정 홍교는 보존상태도 양호하고 우리나라 석교의 아름다운 조형미를 잘 보여주는 매우 중요한 유물로서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이라 한다.
석교인 “육송정 홍교”는 하천의 폭이 12m 정도 되는 곳에 자연석에 석축을 쌓고, 길이 10.6m의 다리를 놓았다. 홍예의 기초는 자연지형을 활용하였는데, 동쪽은 높이 1.7m 암반을 그대로 이용하여 그 위에 홍예돌과 비슷한 크기의 장대석으로 높이 30㎝인 1단의 지대석을 두었다. 서쪽에서는 3단의 지대석을 쌓은 뒤 그 위에 홍예를 올렸는데, 1단에 2개씩의 장대석을 이어서 만들었다. 서쪽 지대석의 높이는 1단이 묻혀 있어 정확히 알 수 없지만 2단이 70㎝, 3단이 60㎝이다.
“육송전 홍교”를 지나면 46번 도로를 접한다. 이곳부터는 일반인이 더 이상 민통선 가까이 접근할 수없는 높은 산악지대이고 이곳도 군사도로서 일부만 최전방이니 진부령으로 넘어갈 수밖에 없다. 이어서 진부령을 넘어 인제군로 내려가는 길목에는 용대리 황태마을 지나게 된다. 이곳은 황태 덕장이 있어 한겨울에 명태를 얼려다 녹았다 반복해서 명태를 만들어 내는 황태 막장이 있고 지나는 이들의 황태찜과 구이로 맛있는 식성을 제공하고 있다. 한번 맛을 본 사람들이라면 지날 때마다 이곳에서 황태 맛을 즐긴다. 황태는 북어를 얼부풀어 더덕처럼 마른 북어이다. 그러나 수년부터는 동해에서는 회유성 명태가 잡히지 않아 러시아등에서 수입 가공하고 있으며 덕장도 수가 줄어들고 있어 많은 아쉬움을 갖게 된다. 국민생선 이었던 명태가 사라진 이유는 노가리와 같이 어린 명태까지 가리지 않고 남획하고, 지구 온난화에 따른 해수온도의 상승, 중국 쌍끌이 어선이 북한수역 조업 등이 지목되기도 한다. 우리 나라 동해에서 그토록 많던 명태의 씨가 말랐다. 우스개도 아닌 표어가 있다. 명태를 되돌아오길 간절히 바라는 마음에서 “집나간 명태를 찾습니다.”라는 표어를 내세우기도 했다.
진부령, 미시령, 한계령은 높이가 500~1000m 넘는 영동, 영서지역의 분수령
진부령과 미시령을 만나는 지점을 지나 46번 도로를 가다보면 백담사가 나온다.
백담사는 미시령과 한계령 중간지점에 있다 워낙 유명한 곳이다. 백담사는 강원도 인제군 북면(北面) 용대2리 설악산에 있는 절이다. 대한불교조계종 제3교구 본사인 신흥사의 말사이다. 647년(진덕여왕 1) 자장이 창건하였는데, 처음에는 한계령 부근의 한계리에 절을 세우고 한계사라고 하였다. 690년(신문왕 10년)에 불타버려 719년(성덕왕 18)에 재건하였는데, 《백담사사적기》에 이때의 중건과 관련된 전설이 수록되어 있다.
낭천현(지금의 화천군)에 비금사가 있었는데 주위의 산에 짐승이 많아 사냥꾼들이 많이 찾아들었다. 이 때문에 산수가 매우 부정해졌는데 비금사 승려들은 그것도 모른 채 샘물을 길어 부처님에게 공양하였다. 더러움을 싫어한 산신령은 하룻밤 사이에 절을 설악산 대승폭포 아래의 옛 한계사터로 옮겼다.
승려와 과객들이 아침에 깨어나 보니 비금사는 틀림없었지만 기암괴석이 좌우에 늘어서고 앞뒤에 쏟아지는 폭포가 있는 산이 이전과 달라 그 까닭을 몰라할 때 갑자기 관음청조가 날아가면서 “낭천의 비금사를 옛 한계사터로 옮겼노라”고 일러주었다고 한다. 지금까지도 이 전설은 그대로 전해지며, 이 지방 사람들은 춘천시 부근의 절구골, 한계리의 청동골 등의 지명이 절을 옮길 때 청동화로와 절구를 떨어뜨려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이와 같은 여러 가지 구전으로 미루어 보면 한계사를 중창할 때 비금사를 옮겨간 것임을 추정할 수 있다.
785년(원성왕 1)에 다시 불탔으며, 790년에 한계사터 아래 30리 지점으로 옮겨서 중건하고 절 이름을 운흥사라고 하였다. 그러나 984년(성종 3)에 다시 불타버려 운흥사지 북쪽 60리쯤 되는 곳으로 이건하고 987년 심원사로 개명하였다. 이때부터 조선 초기까지 전승되다가 1432년 4번째 화재로 다시 폐허가 되었다. 그뒤 2년 만에 심원사지 아래 30리쯤 되는 곳에 법당과 요사채를 세우고 선구사라 하였으나 1443년에 불타버렸고, 1447년 옛 터의 서쪽 1리쯤 되는 곳에 다시 절을 세워 영축사라 하였다. 그러나 1455년 6번째 화재로 불에 타고 이듬해 옛 절터의 상류 20리 지점으로 옮겨 중건하여 백담사라 하였다.
1772년(영조 51) 다시 불타버리자 1775년 최붕, 태현, 태수 등이 초암을 짓고 6년 동안 머물면서 법당과 향각 등의 건물을 중건하고 심원사라 하였다가 1783년(정조 7년)에 절 이름을 다시 백담사로 바꾸었다. 근대에 이르러 한용운이 머물면서 《불교유신론》, 《십현담주해》, 《님의 침묵》을 집필하였다. 6·25전쟁 때 소실되었다가 1957년에 재건하여 오늘에 이른다.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중심 법당인 극락보전을 비롯하여 산령각, 화엄실, 법화실, 정문, 요사채 등이 있으며, 뜰에는 삼층석탑 1기가 있고 옛 문화재는 남아 있지 않다. 현존하는 부속암자로는 봉정암, 오세암, 원명암 등이 있다.
44번 도로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
진부령을 내려서 면 미시령과 방향과 갈라져 46번 도로를 따라 서쪽으로 가다보면 44번 도로를 나오고 부터 인제, 원통이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고 인구밀도는 가장 낮은 곳’으로 알려진 인제는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원통역현의 동쪽 30리에 있다.” 인제 하면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살겠네’라는 말을 떠올리게 되는데, 이 말에 얽힌 유래는 다음과 같다.
옛날 어느 임금이 난리를 피해서 이 고을에 와서 머물렀다. 그는 서울의 형편이 궁금하여 몇 차례나 사람을 보냈는데 그때마다 되돌아오는 이가 없자 다시 한 사람을 보내면서 “인제 가면 언제 오겠느냐”라고 묻고 만일에 또 돌아오지 않는다면 “원통해서 못 보내겠다”라고 했단다. 그 뒤로 이 말은 뜻이 바뀌어 인심이 순박한 이 고을에서 다른 곳으로 식구를 떠나보낼 때 안타까운 마음을 드러내는 말로 쓰였다가, 최전방에서 산간 추위에 고생하면서 민간이를 쉽게 접하지 못하는 군대 생활을 한 사람들의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왔다. 따라서 군에서 이곳으로 배치되면 최악이라고 했었다. 이곳이 워낙 깊은 산골인지라 다른 지방에서 이곳으로 갈 적에 발걸음이 잘 떨어지지 않는다는 뜻으로 많이 쓴다. 그러나 요즈음에는 설악산과 속초를 가는 고속도로와 지방도가 잘 되어있어 옛말이 되어가고 있다.
인재와 원통은 약 8km 떨어진체 두 곳으로 나누어져 있다 인제는 행정상 군청이 있으나 유동인구는 많고 시장성 있는 곳은 원통이다. 많은 사람들이 모이고 최북단 방향을 두고 동쪽에서 북쪽에서 진부령과 미시령 넘거나 해안면 등은 원통이 생활권이며 사통팔달의 중심부라 현재도 면회나 외박 나온 군인들도 모여 있는 곳이 원통이기다 하다.
고진전이 벌어진 해안면 분지 펀치볼에서 지뢰를 찾다
원통에서 453번 국도를 따라가면 다시 휴전선 가까이 접근하게 되면서 서화면을 지나면 최북단 전망대중 하나이며 을지 전망대를 갈수가 있다. 을지전망대는 양구군 해안면 소재이다.
을지전망대에서는 DMZ비무장 지대와 금강산도 보이고 뒤로는 가칠봉. 대우산. 도솔산. 대암산 등 해발 1100m 이상의 산으로 둘러싸인 해안분지가 보인다. 해안분지는 6,25사변 중,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펀치볼이 불리는데 그 둘레를 모두 한눈에 볼수가 있고 분지는 안에는 해안면 마을도 전경이 다 보인다. 마을을 가운데 두고 고지전에서 뺏고 빼앗기면서 많은 군인들과 주민들의 희생이 컸다.
펀치벌내 하천은 수시로 바람불고 비가 내리면 지뢰가 들어나면서 쓸려 내려온다.
대민 봉사 차원에서 농가 주변 하천을 탐지해 보았다. 주변을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지뢰가 발견되었다. 이대로 마을 어귀까지 흘러간다면 인명피해가 발생된다. 지금도 주변에는 아직도 수 많은 대인지뢰와 대전차 지뢰가 무수히 깔려있어 종종 마을 주민들과 농사를 짓는 주민들이 희생되는 지뢰 폭발사고 가 나고 있다.분지 해안면 내에 있는 제 4땅굴을 방문할 수 있다. 이곳은 북한의 기습목적으로 휴전선 비무장지대의 지하에 굴착한 남침용 군사통로이다. 1990년 3월 3일 강원도 양구군 북동쪽 26km 지점에서 발견되었다 너비 1.7m, 높이 17m, 깊이 지하 145m, 전체길이는 약 2.7km에 달하는 암석층에 굴진 구조물로 만들어졌다. 발견과정에서 군견 헌트가 폭발물 탐지 중 북한군이 설치한 목함지뢰를 밟고 폭사했으며 이 공로로 인헌무공훈장을 수여받았고 소위로 추서되었다. 계급이 없는 군견이 최초로 계급을 받은 것이다. 입구 부근에는 헌트의 동상이 세워졌다.
해안면 마을은 청정 농산물이 재배된다.
그중 산간에 심어놓은 무청 시래기가 유명하다 한참 생산될 적에는 마을 주민들의 축제와 함께 무청시래기 축제도 연다. 이러한 평화속에서도 펀치볼 내에 많은 지뢰와 폭탄이 곳곳에 감추어져 통제된 곳이 많으며 아이러니한 평화를 함께 공존하는 곳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