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지 녹색신문에서는 6·25전쟁 제 71주년을 앞두고 6·25 동란중 남한의 중요한 수력발전소인 화천댐 폭파를 예방하기 위하여 몸소 발전소에 머물며 폭파를 예방한 숨은 공로자, 이달우 KC코트렐 명예회장으로부터 6.25 전쟁이 주는 교훈과 당시 상황을 들어봤다.
대담 류재권 사무총장
류재권 : 회장님, 6.25 전쟁은 언제 어떻게 일어났는지요? 6.25를 겪지 못한 후세대들에게 역사교육 차원에서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이달우명예회장 : 6·25동란은 우리민족에게는 있어선 안 될 비극이었지요.
6·25사변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를 기점으로 시작되었습니다.
북한 인민군이 38도선 전 지역에서 우월한 화력으로 대대적인 포격과 기습공격을 감행해온 것입니다. 이를 시작으로 1953년 7월 27일까지 한반도는 전쟁에 휩싸이게 되었습니다. 6·25동란이 일어난 이유는 기본적으로 남북 분단에 있습니다. 근본적인 이유는 우리 민족 내부의 문제라기보다 신흥공산세력의 확장을 위한 도발 즉 외부의 요인에 그 원인이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류재권 : 그러면 남북분단의 원인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명예회장 : 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시점에서, 한반도는 뜻하지 않게 38선을 긋고 남과 북으로 갈라지게 되었습니다. 독일이 동독과 서독으로 분리된 것처럼 일반적으로는 전쟁에서 패한 국가가 분단되는 것이 당연한 수순입니다. 하지만 극동아시아에서는 전범국인 일본이 아니라 지정학적인 위치 때문에 엉뚱하게 한반도가 38도선을 기점으로 분단이 됩니다. 이때부터 비극이 시작된 것이지요.
원자폭탄 2발 투하로 급작스럽게 일본이 항복을 해버리자, 일본군을 무장해제 시킨다는 명분으로 38선 이북엔 소련군이, 38선 이남엔 미군이 각각 진주하게 됩니다. 이로서 민족의 분단이 시작된 것이지요. 원래대로라면 패전국인 일본이 분단되어야 하나, 섬나라이고, 지정학적 위치상 우리나라가 훨씬 중요했기에 어쩔 수 없는 수순이었습니다.
즉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의 대립이 점점 심해지고, 한반도는 두 진영이 만나는 민감한 지역이 된 것입니다. 이런 민감한 때에 1950년 1월 10일 미 국무장관 애치슨은 미국의 태평양 방위선을 알래스카-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잇는 선으로 한다고 발표를 해버립니다. 남한을 노골적으로 배제한 애치슨 선언에 북한은 남한침공 가능성에 대해 오판하게 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고 봅니다.
6·25동란은 위에서도 서술했듯이, 북한의 사전 계획에 따라 일어난 남침전쟁이었습니다. 전 소련의 스탈린이 남침을 이용해서 미소냉전(미국과 소련 사이의 냉전) 사이에 승기를 잡으려 한 의도도 있었다고 저는 봅니다. 스탈린은 김일성과 박헌영의 침략 요구를 여러 번 거절했었다는 기록이 있긴 합니다만.6,25 동란을 일으킨 이유에는 또한 북한의 남침 주도자들에게 있습니다. 북한의 남침을 주도한 주요 인물은 김일성과 박헌영입니다. 김일성은 나중에 실책을 박헌영 등의 사람들에게 뒤집어 씌웠고, 박헌영은 6,25 남침의 시나리오를 제안한 인물이 되었습니다. 전쟁을 일으키기만 하면 남한에 남아 있는 남로당 잔존 세력이 들고 일어날 것이라고 예측을 해서 6·25남침을 부추겼다는 것입니다.한편 소련의 스탈린은 김일성의 요구를 여러번 거절했었지만 한반도를 남북으로 가르고, 북부를 점거하고, 북한을 세우는 등의 일을 했을 때부터 한반도를 그들의 사상으로 채울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한편 중국의 국가주석인 마오쩌둥은 김일성에게 적극적으로 협조했으며, 스탈린 설득을 도왔습니다.
1948년 북한은 북한에서 보내오던 전기를 전면차단
류재권 : 6.25 전쟁 전후 한국의 전기 사정은 어떠했나요?
명예회장 : 1945년 8월 15일 광복을 맞아 이때 38선 이북의 북조선에서는 남한에 공급하던 전력을 1948년 5월 14일을 기하여 모두 차단해 버렸습니다. 당시 북한지역에는 수력발전소가 많아서 전력 사정이 풍부했었습니다. 전기요금을 남한에서 북한으로 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전기 요금 미납이란 핑계로 전력을 차단해 버린 것입니다. 당시 미군정하에서 전기요금 대신에 여러가지 시설 관련 자제를 현금 대신으로 제공하기도 했었습니다. 남한은 북한에서 보내오던 전기가 갑자기 끊겨지자 미국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부산항에 정박한 발전함 자코나함 한대로 연평균 2만 kw의 전기를 생산하는 발전함인데 이를 비롯한 3대를 대한민국 부산, 인천, 포항 등 공업지대에 전부 배치함으로써 다시 공장을 돌릴 수 있었고, 이때 배치한 발전함이 당시 대한민국 총 전력 생산의 60%를 담당했다고 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지어진 화천 발전소
류재권 : 화천발전소는 언제 건설되었나요?
명예회장 : 화천발전소는 일제 강점기에 준공되었고, 3만 KW 전력을 생산하는 수력발전소로 1기와 2기는 일제시대에 완공되었으나 3기 건설 도중 나는 부산 본사 발령을 받았습니다. 4기는 6.25 전쟁 이후 완공되었습니다. 처음엔 댐 높이도 낮았지만 이후 다 아시는 바와 같이 북한의 수공 위협으로 이를 예방차원에서 더욱 규모가 큰 둑을 높이 쌓게 되었던 것입니다.
류재권 : 6.25 당시 화천발전소 근무 중 어려움은 무엇이었나요?
명예회장 : 저는 서울대학교 공대를 졸업한 후 조선전업(한국전력의 전신)에 취업했습니다. 당시 회사 사장님은 직접 인사발령장을 주시며 “고생은 젊어서 해야 값진 거야”라며 최전방인 강원도 화천 발전소로 발령을 내렸습니다.
전시고 차량도 없어서 군부대로 들어가는 군용차량 꽁무니에 붙어서 가다가 갈림길에서 도중에 하차하고, 또 검문소를 찾아가서 초소병인 헌병들에게 “나는 화천발전소 근무발령을 받아 가야 하는데 차편 좀 제공 부탁을 드린다”.고 사정하고 화천방향으로 가는 군용차량에 탑승하여 간신히 도착하니 당시 직원은 10명 내외였습니다. 화천 발전소에서 3년 6개월 근무를 했습니다.
5.25 당시 강원도 화천 지구는 6사단이 공산당과 치열한 전투를 벌리던 중이었습니다. 전세가 불리하면 잠시 후퇴하고 후퇴할 때는 발전소의 중요한 부품을 분리하여 인근 산속으로 가져가 땅굴 속에 파묻고, 다시 국군이 복귀하면 저희들도 발전소로 복귀하여 설치하곤 했으며, 연중 거의 대포의 포화 소리와 총소리의 공포 속에서 전쟁이 끝날 때 까지 목숨을 걸고 화천 발전소의 안전을 지키면서 근무를 했습니다.
송전선도 수시로 절단당하면 한전 요원들이 다시 복구하고 인민군이 나타나면 발전기 등 중요부품을 굴속에 숨겨놓았다가 사라지면 다시 설치하여 전기를 발전시키고 하는 숨바꼭질을 이어가면서 목숨을 걸고 발전소를 사수하였다고 보면 됩니다.
낮에는 인민군들이 많이 숨어들고 비행기 공습이 어려운 밤이면 인민군들의 대포소리 따발총 소리에 잠을 설치기도 하였지요. 피난도 못가고 공포의 3년간을 화천 발전소에서 보내야만 했습니다.
근무 환경도 열악하여 큰 강당 같은 곳에서 취침을 했는데 밤이면 노동자들과 임직원들이 다 같이 합숙하는 형편이었습니다.
일요일 쉬는 날에는 인근 오응리 마을 동네로 들어가면 마을 사람들이 모두 피난가고 없어 마당에 있는 대추나무에 열린 대추를 마음대로 따먹곤 했지요.
지금은 화천 평화의 댐은 관광명소가 되었습니다. 옛날 생각이 나서 가족과 함께 가본 적이 있었는데, 북한의 금강산댐에서 물(水)공격을 하면 당시엔 서울의 여의도가 물바다가 된다고 걱정하여 북한의 수공작전에 대비하여 전두환 정부 때 착공하여 공사가 일시 중단되었으나 김대중 정부시절에 완공하였습니다.
저는 6,25 동난 중에 피난도 못 가고 화천발전소에서 근무하면서 북괴의 폭파로부터 발전소를 수호하고 폭파에 대비해 안전에 온 힘을 쏟은 보상으로 명예스럽게도 무사히 군 복무를 마쳐 감사하기 이를 데 없습니다.
올해 92세(1930년생)인 이달우 KC 코트렐 회장님께서 건강하시고 만수무강 하시기를 기원 드리며 인터뷰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