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급질서 사라지고 기회와 능력에 의한 생존 영위, 절박한 상황이 변화 이끌어 |
「북한의 6.25남침」은 민족의 불행이자 분단의 역사. 그러나 역설적으로 5천년 역사에서 하나님의 은혜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는 자랑스럽게도 5천년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만주를 비롯한 중국 동북부의 광대한 지역을 호령하던 삼국시대가 있었는가 하면 그 모두를 포기하고 반도에 주저앉아 그 높던 기상은 버리고 내홍에 안주하던 시대가 되었다. 그것도 천여 년이란 긴 시간이었다.
항상 중국이란 외세에 자주를 위협받던 기간이다. 더구나 이씨조선 후기 300여년은 각축하는 중국과 일본의 두 외세에 대해 자주와 국기를 바로세우지 못하고 소수집단에 의한 무익한 내홍에 휩싸여 나라와 백성의 의기가 상실되어 급기야는 나라를 포기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그러나 민족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끈기가 2차 세계대전에 합류하여 해방의 전기를 만들었음에도 불구하고 1950년 6.25사변은 이 반도마저 두 동강이로 나누어지게 하여 민족의 역사상 참으로 비참하고 한심한 모습으로 쪼그라뜨렸다.
1948년 해방직후 남한의 인구가 2500만 명, 북한의 인구가 2000만 명, 1953년 6.25사변 직후 남한의 GDP는 68불로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중 하나로 참으로 한심하고 불쌍한 나라로 전락해 있지 않았던가! 이러한 역사적 현실을 외면하거나 알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는 국민 될 자격이 없다하겠다.
북한에 의한 6.25남침은 우리민족 전체에 말할 수 없이 깊은 상처를 주었고, 이산가족 등 그 후유증은 한민족의 지나간 5천년의 역사에서 그 어느 것도 비교될 수 없는 비참한 상황을 만들었다. 그것도 같은 동족이 만든 참상이었으니.
6.25사변은 엄청난 비극이자 수많은 고통을 주었지만 또한 많은 교훈과 더불어 하나님의 은혜가 있었음을 느끼게 되고 알게 한다.
남북으로 갈라지고 전쟁이라는 아픔의 와중에서 과거에 기득권을 누렸던 양반 등 소수지배계급이든, 항상 떠받들고 살아온 중인이나 천민계급이든 모든 계급질서가 실질적으로 사라지고 기회와 능력에 의해 생존을 영위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이 되었고, 전체국민들의 의식의 해방과 자주성이 강화되고 능력이 배양되어지지 않았는가 생각해 본다. 여기에서 우리는 깊이 생각해 볼 사항이 있다.
교육이다. 우리나라는 해방 후 초중고 학교가 제도화 되어 보편교육이 이루어 졌으나 사회적 적응이 쉽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나라는 60년대가 종전이 아니었으므로 군대가 65만 명으로 국군의 모태인 경비대 시절 6,000명에 비해 100배가 넘는 군인들이 일제히 교육과 훈련을 받았다.
공교육이 보편화되기 전에 군대는 20대 청년들의 집단적 교육과 훈련 기관이었다. ‘70년대 대기업이나 중소기업 등에서 그 기술 어디에서 배웠느냐하면 “군대에서 배웠다”라는 대답을 쉽게 듣게 된다. 역설적으로 6.25가 아니었으면 훈련될 수 없는 교육기회였다는 생각이 든다. 대학은 고사하고 중고등학교도 정규적으로 못 다닌 친구들이 기업의 중견간부로 일한 친구들이 많았음을 기억한다.
다행히 70년대 이후 산업이 발달하고 90년대 고도성장 시대로 진입해 가는 과정이었기에 더욱 군대에서의 교육은 보편교육 기능을 톡톡히 한 것이다.
아세아의 동쪽 광할한 지역에서 쫄고 쫄아서 한반도의 남쪽 반에 머물면서 세계200여개 국가에서 10위권 경제 대국으로 발 돋음 한데에는 다른 큰 요인과 함께 6.25의 참극이 빚어낸 소중한 결과가 한 몫을 해 낸 것을 생각하면 섭리의 한 부분이었음을 감사한다.
아울러 동시대인 1948년 5월에 건국한 이스라엘의 경우 건국과 더불어 사방으로부터 아랍권 국가들과 전쟁을 치르면서 국가의 틀을 잡았지만 1973년까지 전쟁을 치러 오늘날의 이스라엘이 된 것에 비해 우리나라는 휴전이후 한미동맹의 틀 안에서 67년을 경제발전에 올인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무에게나 오는 기회가 아니었음에도 감사한다.
한 가지 덧붙혀 크게 감사할 것은 6.25남침의 계획서는 그 자체로서는 역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라고 한다.
이유는 원 계획은 38도 선에서 부산까지 거리를 480km로 보고 일일 평균 10km씩 진격하면 50일 만에 부산까지 도달하여 전쟁을 끝내고 8월15일에 해방5주년 기념식을 서울과 부산, 평양에서 동시에 진행하도록 되어 있었으니 이 얼마나 아찔한 상황이었냐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은 초기 기습을 통하여 서울을 장악한 것 외에는 승전에 취해 중앙청, 서대문형무소, 방송국을 점령하여 방송으로 공산주의를 선동하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이일로 서울에서 3일을 지연하면서 서울에서 발이 묶인다.
이 소식을 들은 스탈린이 긴급전문을 내렸다. “조선군사 당국은 전진하려는 생각을 갖고 있는가?” 이 문장을 의역하면 “김일성은 정치와 전쟁을 구별하고 있는가?”이다.
이때 6월 27일 북한 제105전차 여단은 한강교 점령을 앞두고 있었다. 이어 양익 포위에 따른 국군 주력부대 박멸이었고, 도강해 그 길로 부산으로 내리 달려 전쟁을 끝내놓고 정치를 했어야 하는데 정치와 전쟁을 병행한 것이 패착의 원인이 되었다.
또 한가지 패착은 군지휘관과 정치위원을 동시에 두었는데
작전에 정치위원의 의견 아니 간섭이 문제였다.
원칙 세움과 작전은 구별되어야 하는데 정치위원의 의견이 항상 끼어들어 효율적인 작전수행을 방해한 것도 큰 원인이었다고 한다.
나는 시골집 사랑방을 정치위원이 차지하고 있어 직접 목도한 경험이 있다.
이어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으로 역전되었고 압록강까지 후퇴하는 수모를 격게 되는데 이때 중공군의 참전으로 우리는 다시 3.8선, 휴전선으로 몰리게 되었던 것은 참으로 가슴 아픈 일이었다.